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대중문화 개방 (문단 편집) === 각계의 반응 === 이렇게 위에서부터 일본 문화 개방에 난색을 보이는 가운데, 당시 대학가도 1964~65년 [[6.3 항쟁]] 및 [[한일협정 반대투쟁]], 1984년 전두환 방일 반대 투쟁에서 볼 수 있듯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다만 1965년 서울대에서 강연을 한 '14대 심수관(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의 인터뷰에 따르면 "한일관계가 좋지 않지만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강연장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지만 좀 지나자 누군가가 일어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향해 걸어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당시 학생들도 무조건적인 반일이나 혐일[* 이러면 공산권과 관계 개선을 할수가 없다.]이라기보다는 사회 분위기나 굴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정치적 요소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좌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해 사회적 반대가 심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운동권에서는 [[종속이론]]에 근거하여 매판자본 및 일본 종속화 비판, 외세 배격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달가워 하지 않았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수입차 역시 한국 시장에서는 거의 판매고를 올리지 못했다. 광복회 등 호국보훈 단체와 순국선열 유족회 등 애국 성향 단체들 역시 과거 35년간 한반도를 장악 및 지배하여 한민족을 고압(苦壓)으로 몰아간 왜놈들의 저질적이고 침략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 분야에 식민지를 만들어낼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반대했다.[*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권에서도 제법 파급 효과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과 다르게 이 당시는 일본 문화가 아시아에서는 독보적이었으며, 서양에서도 각광받던 시기였다.] 거기에 [[독도]] 영유권 및 [[재일교포]] 차별 문제까지 해결되지 못한 마당에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우려가 있었는데, 일본에게 국가 재정의 반(半)을 파탄시킬 정도로 돈을 퍼줄 대가가 있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1988 서울 올림픽]] 항목에서도 소개된 일화이지만, 올림픽 유치 당시 일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당시 소련) 위원이 한국이 일본에서 받은 차관을 걸고 넘어진 일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는 일본어를 쓰거나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주의깊게 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종교계의 반대도 심했는데, 가령 [[천주교]]와 [[개신교]]계의 경우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앞장서서 일본 문화를 배척했다.[* 현대 기준으로도 보수적인 신학을 하는 교단들은 대부분 신사 참배에 반대했다. [[침례회]], [[성결교회]]는 물론이요 [[장로회]] 등에서도 [[숭실대학교]], [[고신대학교|고려신학교]] 등이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자발적으로든 강제로든 문을 닫은 사건도 있었으며 [[유관순]], [[김구]], [[이승만]] 등 기독교 신자인 독립운동가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계도 김길창, 홍택기, [[정춘수]], [[양주삼]] 등의 일부 예에서 보듯 신사참배 참여로 일제에 부역한 전력이 있으며 현재도 공식적인 반성이 없다.] 특히 당시 '낮은 울타리' 같은 잡지에서는 대놓고 "일본 문화는 마귀적인 우상 숭배 문화이니 죽어도 들여올 수 없다."는 논지의 글도 있었다. 또 [[성균관]] 등 [[유교]] 및 [[유림]]계[* 유림계 역시 [[김창숙]] 선생이 유림들을 이끌고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한 적은 있으나 그러면서도 경학원이나 조선유도연합회 등의 일부 케이스에서 보듯 친일 행적도 있어 그런 말할 처지가 못 된다.]도 반발하며 한민족을 말살하고 유교 문화까지 탄압하며 말살하려고 했던 일본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조상들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나마 불교계는 대일 교류의 역사가 꽤 됨에도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 불교 역시 [[한용운]]처럼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지만 이회광, 이종욱 등의 예처럼 친일 부역 전력도 있다.] [[원불교]]와 같은 민족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성적인 컨텐츠가 당대 한국보다 훨씬 활성화되었던 데다가 이런 종류의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이러한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대해 심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본의 방송국들 대다수가 민영방송이었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률을 올리려는 민영방송들은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강한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그래서 개방 직후에 나온 [[퇴마록]] 혼세편을 보면 퇴마사들이 지금의 [[무한도전]] 수준의 가학성 높은 일본의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며 문화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추세는 동시기 서, 북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유럽은 전체적으로 한술 더 떠서 공영방송부터가 한국인이 볼 때 선정성, 폭력성 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다.] 민영방송이 신문사와 겸업을 하고 있어서[* 한국도 1980년 [[언론통폐합]] 전까지는 가능했다가 2009년 [[미디어법]] 개정 전까지는 법적으로 아예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심의 강화 움직임에 대해 대응을 하였던 것. 거기에다가 이러한 심의 움직임에 대해 문화계 내부의 반발이 강해서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부터는 범죄 관련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면서 심의가 강화되어가고 있지만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폭력성이나 선정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만화 가운데서도 이런 폭력성이나 선정성이 심각한 만화들도 꽤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는 저질 문화'라는 통념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제작된 컨텐츠가 아니더라도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일본을 다룬 영화가 수입 단계부터 불허되거나 수입했어도 개봉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64년 동아일보는 일본 문화가 유입되는 당시 상황을 미국이 일본을 [[서부극]]으로 장악했듯, 일본이 한국에 가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침략 형태"라며 이러다간 "한국의 얼은 머지않아 일본화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주로 중상류 계층에겐[* 사실 당시엔 외국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도시에 거주하거나 어느정도는 산다는 뜻이었다. 고로 어떤 측면에선 보편화라고 보긴 좀 어려울수도 있는데, 기사가 우려를 섞어 과장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TV를 통하여 일본화되어 가고 있다"거나 "뒷골목에는 일본의 저속한 잡지가 유통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0600209201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06&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09&publishType=00020|기사]]. 해당 기사를 읽어보면 대중문화 자체보다도 여러 일본어 잔재들이 살아나고 일본 음식과 수입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등 전반적인 일류 현상 자체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기만 해도 이런 일본산들이 판치지 못했는데, 자유당 말기와 장면 내각부터 이런 흐름이 완화되더니 박정희 정부 들어 심해졌다며, 정부도 이에 당황했는지 제재 강화를 고려하고 있다는 공보부 장관의 말로 기사가 마무리된다. 실제 박정희 정부는 1967년에 한일문화교류 협정을 추진하려고도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자 무산시킨다. 이는 일본 문화가 아니더라도 주로 일제, 국산을 막론하고 만화,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당시 부정적인 사회 인식도 한몫했는데, 1948년 수필가 양미림의 <만화시비>와 [[염상섭]]의 <만필의 만화시기> 등과 같은 활자 문학인들의 만화 비판, 그리고 간윤의 [[만화 검열제]] 등으로 만화를 '비교육적 저질문화' 취급하며 만화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어린이날에 어느 나라 작품이건 상관없이 만화책들을 모아 '''불량만화'''라면서 태우는 행사 같은 것도 있었고, 심지어 1980년 8월에는 <방송자율정화방안>의 일환으로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을 실시한 바도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만화와 애니를 주 문화 산업으로 키워나가던 일본 문화 같은 걸 개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만화, 특히 [[일본 만화]]가 주로 폭력에 포악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고 노출 장면도 잦다는 악평이 있어 일본 문화가 저질 문화로 인식되어 온 것도 더해졌다. 그리고 이런 편견 때문인지 2000년대 초만 해도 건전한 수준의 전연령용 및 아동용 컨텐츠가 들어오면 '''"이게 일본 만화였어?!"'''라고 놀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여파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던 [[구로사와 아키라]], [[미후네 토시로]] 등 일본 영화인들, 일본에서 많이 활동한 [[덩리쥔]] 등은 유독 한국에서만 대중들에게 전혀 인지도가 없는 상태로 20세기가 지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